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월 혁명 (문단 편집) == 봉기 == 프랑스에서 [[프랑스 제2공화국|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군중들의 몰려들어서 자유주의 체제의 수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패닉]]에 빠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면서 황급히 [[표현의 자유]]와 [[의회]] 수립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적 헌법을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뒤집고 군대를 동원해 소요를 진압하고자 했다. 하지만 야전 경험은 풍부해도 소요를 진압한 경험은 적었던 프로이센군은 군중들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도리어 피를 본 군중들의 분노만 더 키우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3월 18일이 되면 베를린 곳곳에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역으로 진압군을 격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사실 인근의 [[포츠담]]으로 도망쳐서 전열을 정비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성격이 원체 우유부단한 데다 꼴에 '내가 이 나라의 국왕인데 어떻게 수도에서 도망치냐'고 탈출을 거부하기도 했다.]는 결국 다시 시민들에게 굴복하여 시민들의 무장을 허용하는 한편(!) 자유주의적 개혁을 다시 실시할 것을 약속하였다. 심지어 3월 21일에는 시민군 사망자들의 장례식에 국왕 본인이 혁명을 상징하는 모자 프리기아를 착용하고 참석하기도 했다.[* 물론 반강제로 끌려간 것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국왕은 귀족들에게 미친듯이 까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제국]]의 [[빈(오스트리아)|빈]]에서도 3월 13일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요구하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빈 체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 황제 [[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페르디난트 1세]]는 진압을 명령했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고 결국 메테르니히는 황제에 의해 재상 자리에서 해임[* 다만 황제가 능동적으로 해임한 것은 아니고 오스트리아 제국 의회(Diet)와 시위대가 강경하게 요구해서 마지못해 해임한 것이다.]되어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마찬가지로 페르디난트 1세 역시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위대에게 약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소요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황제의 밍기적거리는 태도에 분노한 빈의 노동자들이 다시 시위를 일으켰고 헝가리에서도 코슈트 러요시를 지도자로 삼은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헝가리의 경우 진압군이 독립군에 연전연패하는 바람에 결국 러시아에게 부탁하여 러시아군이 진압하게 되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12월 2일 황제직에서 퇴위했다. 그 외에도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바덴 대공국]] 및 군소 연방국, 헝가리와 폴란드 같이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던 지역 등 독일어권 거의 모든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군주들은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황급히 자유주의적 개혁을 약속해야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